국제 AI가 사들이는 헌책 수만 권…책등 잘라 스캔한 뒤 폐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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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구하기 어려운 지역사와 전문 지식이 담긴 오래된 종이책이 인공지능(AI) 학습을 위한 새로운 데이터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유럽과 호주의 헌책방에서 특정 분야와 무관한 책 수천~수만 권을 한꺼번에 사들이는 주문이 나타나면서 AI 기업이 배후에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지난 5월 아일랜드 골웨이의 중고서점 ‘케니스 북숍’에는 책 5000권을 한꺼번에 사겠다는 주문이 들어왔다. 코네마라 전문서적과 함께 20여 년 전 아일랜드 정부 특별저축장려계좌(SSIA) 투자 안내서 등이 섞여 있었고, 가격 흥정 없이 온라인 표시 가격을 그대로 지불했다. 서점 주인은 이를 “미친(bananas) 주문”이라고 표현했다.
아이리시타임스에 따르면 독일 베를린의 중고서점과 고서점에서도 밤사이 수만 유로 규모의 주문이 들어오는 사례가 나타났다. 역사서와 전문서뿐 아니라 오래된 운전면허 시험 안내서까지 포함됐다. 주문은 저자나 분야가 아닌 ISBN을 기준으로 아직 확보하지 않은 책을 자동 구매하는 방식으로 보였으며, 책을 물류 거점으로 모은 뒤 미국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의 배후로 AI 기업이 의심받는 이유는 학습 데이터 때문이다. 챗GPT와 클로드 같은 대규모언어모델(LLM)은 뉴스·논문·웹사이트·블로그 등을 학습하지만 인터넷 콘텐츠의 품질은 일정하지 않다. 앤스로픽의 한 공동 창업자는 AI가 인터넷의 질 낮은 문장 대신 책을 학습하면 ‘글을 잘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취지의 견해를 내부 문건에서 밝혔다. 메타에서도 대규모 디지털 도서 자료 접근이 경쟁력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내부 이메일이 오간 사실이 미국 법원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미국 데이터 업체 ISBNdb는 오래된 인쇄물을 AI 학습 데이터로 활용하는 사업을 홍보하며 오래된 책에는 ‘AI 슬롭(AI slop·AI가 대량 생산한 저품질 콘텐츠)’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역사와 전문 지식, 생활 문화, 소수 언어 자료가 담긴 책은 인터넷 자료와 겹치지 않는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이런 의혹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앤스로픽의 ‘프로젝트 파나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월 법원 문건을 토대로 이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계획서에는 “전 세계의 책을 파괴적인(destructively) 방식으로 스캔하려는 프로젝트”라는 표현이 등장했다.방식은 중고책을 대량 구매한 뒤 유압식 절단기로 책등을 잘라 낱장으로 만들고 산업용 고속 스캐너로 디지털화한 다음 종이를 재활용하는 것이었다. 앤스로픽은 수천만달러를 투입해 수백만 권을 확보했고, 외부 업체 계획에는 6개월간 50만~200만권을 디지털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베터 월드 북스와 영국 월드 오브 북스도 공급처로 등장했다.
저작권 문제도 얽혀 있다. 앤스로픽 공동 창업자 벤 만이 2021년 불법 도서 공유 사이트 ‘LibGen’에서 소설과 논픽션을 대량 다운로드한 사실이 소송 과정에서 공개됐다. 미 연방법원 윌리엄 알섭 판사는 책을 AI 학습에 사용하는 행위 자체는 ‘변형적 이용’에 해당해 공정 이용이라고 판단했지만, 수백만 권의 해적판 전자책을 내려받아 보관한 행위까지 공정 이용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앤스로픽은 작가·출판사 측과 15억달러 규모 합의에 나섰고 미국 법원은 지난 7월 이를 최종 승인했다. 약 50만개 저작물이 대상이며 책 한 종당 지급액은 3000달러 수준이다. 반면 합법적으로 구매한 종이책을 파괴적으로 스캔해 AI 학습에 사용한 행위에는 공정 이용 판단이 내려졌다.
비슷한 대량 주문은 호주와 스페인 카탈루냐에서도 나타났다. 가디언에 따르면 호주 서점들은 평소 고객이 찾지 않을 법한 책까지 포함된 주문을 받았고, 일부 서점상은 AI 학습용으로 해외 반출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카탈루냐에서도 오래 팔리지 않은 카탈루냐어 논픽션과 지역 서적에 해외 주문이 들어오자 서점상과 AI 전문가들이 ‘조용한 약탈(The Silent Plunder)’ 가능성을 제기했다. 다만 실제 책이 어느 AI 기업으로 흘러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출판업계에서는 실물 책의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초판과 재판은 다르고 종이와 제본도 다르며, 책에 남은 메모·밑줄·장서인·저자 서명과 헌사 역시 기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에 사라질 것으로 여겨졌던 종이책이 오히려 AI 시대의 핵심 자원으로 다시 주목받는 셈이다. 20여 년 전 구글이 ‘구글 북스’로 도서관 책을 디지털화했다면, 이제 AI 기업들은 인간의 언어와 사고방식을 기계에 가르치기 위해 책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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