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LF 우크라이나에 가린 ‘분쟁지역’ 예멘·아프간…“우릴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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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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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구호단체들 “인도주의 위기”

예멘 반군과 7년 분쟁 이어져

온나라 파괴돼 피란민 430만명

아프간 국내피란생활 350만명

“인구 절반 인도적 지원 필요”


미국과 유럽 등 세계의 관심과 지원이 러시아의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에 집중되는 가운데 예멘, 아프가니스탄 등 다른 분쟁·재난 지역에 대한 지원이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예멘에서는 “우리를 잊지 말라”는 호소가 쏟아지고, 국제 구호단체들은 분쟁 지역 주민들에게 임박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최근 자료를 보면, 예멘에서 반군과 사우디아라비아 주도 연합군의 전쟁이 7년째 이어지면서 발생한 국내 피란민이 430만명에 이른다. 사실상 온 나라가 파괴되면서 전체 인구의 70% 수준인 2천만명이 인도주의적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난민기구는 밝혔다. 지난해 탈레반이 국가를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분쟁을 피해 고향을 등진 피란민이 여전히 350만명이나 되며 식량 지원 등이 필요한 인구도 2400만명에 이른다. 두 나라의 국내 피란민 규모는 러시아의 침공 이후 발생한 우크라이나 국내 피란민 700만명보다 80만명 이상 많다.


7년의 분쟁으로 폐허가 된 예멘



예멘의 인도주의 위기는 2014년 초 친이란 성향의 후티 반군이 서북부 지역을 장악하면서 본격 시작됐다. 반군이 수도 사나까지 점령하면서 나라 전체가 반군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 커지자, 사우디는 이듬해 아랍에미리트(UAE) 등 9개국과 연합군을 형성해 내전에 개입했다. 내전이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중동 국가들과 이란의 대리전 성격으로 번졌고, 미국·영국 등도 연합군 지원에 나섰다.


몇년 동안 소모전 형태로 이어지던 전쟁은 지난해 말 후티 반군이 정부군의 최후 주요 거점인 마리브 점령을 시도하면서 다시 격렬해졌다. 반군은 올해 들어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의 정유 시설 등에 대한 미사일 공격까지 감행했고, 연합군은 반군 점령 지역에 대한 공습으로 맞섰다. 양쪽은 유엔의 중재 노력으로 지난달 2일부터 두달 동안 휴전에 들어갔지만, 종전까지 가는 길은 여전히 험난하다.


유엔난민기구는 전쟁이 길어지면서 고향을 등지고 떠도는 피란민이 2015년 초 250만명에서 올해 3월 430만명까지 늘었다고 밝혔다. 피란민의 40%는 식수·보건·교육 등 기본적인 서비스도 제공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난민 시설을 지원하는 ‘캠프 조정·관리 위원회 클러스터’의 자료를 보면, 난민 시설 내 주민의 70% 이상에게 식량과 식수를 적절하게 공급할 수 있는 시설은 전체의 5%에 불과하다. 난민 시설에 있는 학생 중 70% 이상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할 여력이 있는 곳도 전체의 12%뿐이다.


예멘 서부 해안 지역 후다이다(호데이다)에서 보건 사업을 벌이고 있는 아스마한 바다니 박사는 지난달 초 국제 개발 전문 사이트 ‘데벡스’에 기고한 글에서 5살 이하 어린이 230만명이 영양실조에 시달리면서 10분에 한명꼴로 숨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가 진료소에서 치료해 돌려보낸 아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건강이 악화돼 진료소를 다시 찾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바다니 박사는 “연료까지 부족해 전기는 사치품이 된 지 오래”라며 “기온이 38도까지 치솟는 와중에도 2주일에 단 몇시간 정도만 전기가 공급되고 있어 진료소나 병원, 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너무나 어렵다”고 호소했다. 그는 “국제사회가 예멘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세계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유엔난민기구는 올해 예멘 난민 지원금으로 2억9130만달러(약 3700억원)를 책정했지만, 지난 5일 현재 세계가 지원을 약속한 액수는 목표의 12%인 3641만달러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탈레반 집권 이후 잊힌 아프간



지난해 여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이후 세계는 아프간 상황에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지만,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예멘에 못지않다. 미군 철수 이전부터 대규모로 발생한 난민 사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해, 지난해 연말 현재 국내에서 피란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인구가 350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64%는 어린이들이며 20%는 여성이다. 유엔난민기구는 “아프간 인구의 절반 이상인 2400만명가량이 인도주의적 지원 없이 생활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전쟁을 피해 주변 국가로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아프간 주민도 22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지난달 중순 현재 파키스탄에 머물고 있는 아프간 난민이 144만8천여명이며 이란에도 78만명의 아프간 난민이 남아 있다.


하지만 각국의 지원은 인색하기 짝이 없다. 유엔은 올해 아프간 지원금으로 44억달러 모금을 추진하고 있으나, 지난달 초까지 국제사회가 지원을 약속한 액수는 절반 수준인 24억달러에 그쳤다. 비정부기구인 ‘국제 구조 위원회’의 데이비드 밀리밴드 대표는 “굶주림과 인도주의적 지원 필요성이 계속 커지고 있다”며 국제사회의 지원 부족은 “아프간 국민에게 즉각적이고도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탈레반의 여성 인권 억압이 국제사회의 아프간 지원을 막는 요소로 작용하면서, 아프간 국민은 인권 탄압과 지원 부족이라는 이중의 고통에 빠져들고 있다. 세계은행은 탈레반이 지난 3월 중순 여학생들의 중등학교 등교를 금지한 이후 6억달러 규모의 개발 지원 사업 4건 추진을 중단했다. 미국 정부도 탈레반의 권력 장악 이후 동결 조처한 미국 내 아프간 자산 70억달러 가운데 절반을 여전히 묶어 두고 있다.


미국 등의 이런 조처가 결과적으로는 아프간 인권 상황 악화에 일조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엔인권이사회의 임명을 받아 활동하는 14인의 인권 전문가들은 지난달 말 미국의 아프간 자산 동결이 인권 상황을 악화시키는 또 다른 요소라고 지적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국제법상 각국 정부는 자신들의 행동이 인권 침해를 초래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다”며 국제사회에 아프간 상황을 개선할 대책을 촉구했다. 


티그라이·시리아 등도 ‘끝없는 전쟁 고통’



에티오피아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1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티그라이 지역, 10년에 걸친 내전으로 온 나라가 파괴된 시리아에서도 인도주의 위기가 날로 커지고 있다.


유엔난민기구의 최근 자료를 보면, 시리아 국민 360만명이 현재 터키에서 난민 생활을 하는 등 660만명이 낯선 외국 땅에 살고 있다. 에티오피아 티그라이 지역에도 국내 피란민 10만명, 이웃 나라 수단으로 피란한 주민이 4만5천명에 이른다. 이슬람 테러 집단의 공격으로 분쟁에 휘말린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 ‘사헬’ 지역에도 분쟁 피해 주민이 260만명 정도이며 국제 난민도 93만명이 발생했다고 난민기구는 밝혔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지난달 13일 세계가 티그라이, 시리아 등의 인도주의 위기를 외면하고 있다며 “세계가 정말 흑인과 백인의 목숨에 공평하게 주목하는지” 의문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 등으로 국제 곡물 가격이 폭등하면서 분쟁 지역 난민들의 상황은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유럽연합(EU),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구성한 ‘식량 위기에 맞서는 글로벌 네트워크’는 지난 4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에티오피아, 예멘, 남수단, 마다가스카르 등의 주민 57만명이 재앙에 가까운 식량 위기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5년 전보다 571%나 증가한 수치다. 보고서는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시리아, 예멘, 남수단, 아이티를 식량 위기가 가장 심각한 지역으로 꼽았다.


유엔난민기구 특사인 미국 배우 앤절리나 졸리는 지난 3월 예멘을 방문한 자리에서 “전세계에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도는 이들이 8천만명 이상이며 이들에 대한 지원 촉구에 세계가 제대로 호응하지 않고 있다”며 “분쟁에 대응하고 피란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존엄과 안전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울 해법을 시급하게 찾아야 한다”고 전세계에 호소했다. 하지만 두달이 지나도록 졸리의 호소에 세계는 제대로 응답하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군사 지원은 계속됐지만 우크라이나 국민의 전쟁 고통을 줄여주지는 못했다.|한겨레|